달라스 모닝뉴스, 북텍사스 한인 원로회 박영남 회장 심층 조명
박영남 회장 부부가 갈랜드 자택에서 사진 앨범을 보는 모습이 달라스 모닝뉴스 기사에 실렸다. [출처 : 주간 포커스 텍사스]
“50년 넘게 달라스 한인사회와 주류사회 연결하는 가교 역할”
달라스 지역 유력 일간지인 달라스 모닝뉴스가 50년 넘게 북 텍사스 한인사회를 위해 헌신해온 북텍사스 한인 원로회 박영남(찰스 박) 회장을 4일(화)자 인터넷판을 통해 비중 있게 다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찰스 박(Charles Park)은 50여년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70년 한국에서 로스앤젤레스국제공항에 도착한 그는 공중전화를 사용할 줄도, 영어로 길을 묻는 법도 몰랐다. 올해 88세가 된 그는 이후 수십년 동안 북 텍사스 지역에서 한인사회의 대표성 확대를 위해 앞장섰고,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와 자원을 제공하는데 힘써왔다.
그는 달라스 코리아타운의 한 제과점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과 미국은 제도가 다르다”며 특유의 헌팅캡을 쓰고 나무 부스에 앉아 있는 자신을 알아본 직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어 “한인들이 미국의 제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달라스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협회(Dallas Asian American Historical Society)’의 공동 설립자인 스테파니 드렌카(Stephanie Drenka)는 박씨를 ‘가교를 놓는 사람(bridge builder)’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한인사회 안에서는 세대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고, 한인사회와 외부 사회를 이어주는 역할도 했다”며 “달라스 한인사회의 비공식적인 지도자와 같은 존재”라고 전했다.
박씨는 현재 ‘북 텍사스 한인노인회(North Texas Council of Korean Elders)’ 대표를 맡아 지역사회를 연결하고 공동체를 기념하는 활동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거의 90년전, 수천㎞ 떨어진 한반도에서 시작됐다.
■ 텍사스로 향한 여정
박씨는 1937년 북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가족은 공산정권을 피해 남쪽으로 피란했고 곧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전쟁 중 아버지가 납치됐고 누나는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가족은 전쟁으로 산산조각 났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학업에 매진했고 한국의 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는 “그것만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고 회상했다.
1960년에는 한국의 민주화 시위와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권위주의와 부패한 정부에 맞선 4·19 혁명에 참여한 공로로 혁명 50주년을 맞아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64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같은 해 결혼했다. 이후 친척이 캘리포니아에서 일자리를 얻자 1970년 아내와 두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했고 미국에서 셋째 자녀를 얻었다. 그는 “생계를 꾸리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영어를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고 말했다.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그는 한인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대학 동문 명부를 만들어 정보와 자원을 공유하고 공동체를 결속하는데 힘썼다. 이후 가족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오클라호마를 거쳐 1978년 무렵 달라스로 이주했다. 그는 텍사스에서 더 나은 미래를 꿈꿨다. 그는 “아이들과 나 자신을 위해서였다”며 “큰 도시일수록 아이들이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당시 달라스에서는 많은 한인이 교수와 간호사, 의사로 일하거나 의류·청소업에 종사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는 오늘날 코리아타운과 아시안 무역지구(Asian Trade District)로 발전한 해리 하인스 블러바드에 회계사무소를 열었다.
캐롤튼에 형성된 달라스-포트워스 지역은 텍사스에서 가장 큰 한인 공동체 가운데 하나다.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텍사스에는 미국내 한인 약 180만명 가운데 약 6%가 거주해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한인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 지역사회 활동
박씨는 달라스 한인들이 생계를 꾸리고 세금을 신고하며 주택을 구입하고 공공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여러 장벽에 직면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또 공직과 각종 지역위원회에서 한인들의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점도 절감했다. 그는 이러한 공간에 한인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고자 했다.
그는 재미한인연합(Korean American Coalition), 달라스 한인회(Korean Society of Dallas), 북텍사스 한인상공회의소(Korean American Chamber of Commerce in North Texas) 등 여러 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한인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지역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회는 한인사회의 중요한 공동체 공간이 됐고, 한인 신문은 각종 정보를 전달하는 핵심 매체 역할을 했다.
2000년 무렵 박씨는 갈랜드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비록 낙선했지만 지역사회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여러 자문위원회에서 활동했고 시민 아카데미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그는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많이 알아야 다른 한인들에게도 조언할 수 있다”며 “미국 시스템은 이렇게 운영된다고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무엇보다 ‘주류 사회(the mainstream)’에 적극 참여하려고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렇지 않으면 두 사회가 너무 분리돼 있었다”며 “미국사회는 한인사회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고, 한인사회도 미국사회를 잘 몰랐다. 나는 그 벽을 허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서로 다른 공동체가 대화와 이해를 넓힐 수 있도록 토론회를 개최했다. 특히 1990년대 긴장이 고조됐던 흑인사회와 한인사회의 관계 개선을 위해 힘썼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갈랜드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NAACP)로부터 ‘브리지 빌더상(Bridge Builder’s Award)’을 받았다.
박씨는 미국의 가장 큰 힘은 다양성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 오늘의 찰스 박
박씨는 서서히 은퇴를 준비하고 있지만 여전히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도 자주 방문한다. 그는 3자녀와 8명의 손주를 두고 있으며 평화봉사단(Peace Corps) 활동부터 해외 학위 취득, 영화 제작 크레디트 참여까지 가족들의 다양한 성취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도 한인사회 내부에는 세대간 차이와 소통의 장벽이 남아 있어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사회는 자신이 처음 도착했던 1970년과는 크게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지금은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며 “55년전보다 미국인들이 한국인을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됐다. 그래도 한국인은 여전히 소수자”라고 전했다.
박씨는 현재 드렌카처럼 2023년 ‘올해의 인물(Person of the Year)’로 선정된 한인 지도자들을 매년 기리는 시상식을 마련하고 있다. 또한 그는 드렌카가 설립한 역사협회의 첫 구술사(oral history) 기록 참여자 가운데 1명이기도 하다. 드렌카는 박씨를 친할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표현하며 그의 삶과 가르침은 북 텍사스 여러 세대에게 큰 자산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영감이 꼭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